삶을 고민하다/손가락 가는 대로

별들의 운행을 고찰하더라도

별아저씨의집 2007. 8. 10. 02:48
읽던 책에 이런 말이 있었다.

'별들의 운행 경로를 고찰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무시하는 오만한 학자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미천한 농부가 하나님을 더욱 기쁘게 하는 법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에 나오는 대목이란다.

오늘 몇달간 땀을 흘리게 하던 프로젝트의 결과가 나왔다. 블랙홀의 질량을 계산하고 은하들의 속도값을 재고.. 10미터의 급의 KECK망원경을 써서 겨우 할수 있는 일이고 10년 뒤에는 다 틀린 결과로 판명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지도교수는 선구적인 일이라며 흥분했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 별의 운행을 고찰하는 류의 일이다 어쨌거나.

산타바바라에 머문 지가 2년이 넘어 3년째가 시작되었다. 다음 자리를 찾아 어플리케이션을 내야하는 가을도 얼마남지 않았다. 서로 힘 자랑 지식 자랑하며 막대한 연구비와 망원경 시간을 따내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미국 대학사회의 한복판에서, 그리고 그 결과들에 의해 좌지우지될것처럼 보이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나는 별의 운행을 고찰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무시하는 오만한 학자가 되어가고 있지는 않나 생각한다.

계속 논문을 내야하고 그리고 그 논문들을 팔러 다녀야하고 그리고 연구비를 따야하고 연구비를 따낸 뒤에는 다음 연구비를 따기 위한 프로포잘을 쓰기 시작해야 한다. 과학이 주는 흥미와 보람과는 딴판인 이 판의 형국이 꽤나 거추장스럽다. 박사과정때부터 게임의 규칙을 철저히 따라 논문, 연구비, 망원경 시간 등에 얽매여 온 나는 요즘 초월이라는 의미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축구를 기독교적으로 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건 축구의 규칙을 가장 잘 지키면서 (그러니까 반칙도 하지 않고) 게임에 임하는 것이다. 과학, 직업도 그런 면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같은 게임의 규칙을 따른다해도 신앙인의 삶에는 초월함이 있어야 한다. 게임의 규칙을 초월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는 모종의 초월이 요구된다. 그 중에 하나는 언제든지 경기장을 박차고 나갈수 있는 그런 자유함이 아닐까? 이 대학이라는 경기장을 박차고 나가버려?

자신의 영혼을 무시하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
미천한 농부는 자신의 영혼을 무시하지 않기가 더 쉬운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콧대높은 학자들처럼 오만하지 않기 때문일까?
그럼 미천한 학자는 어떨까? 매력없다고? 분명 오만한 농부도 있을터인데... 아, 영혼이 돌봐 달라고 소릴 지른다.

2007년 8월 9일